[쿠로코의 농구]
카가미 타이가 x 키세 료타
화황 火黃
「다음 주 월요일, 시간 됨까?」
간만에 키세에게서 온 메일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카가미는 내심 두근거려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확인했다가 조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평소에 잘 넣는 화려한 이모티콘이 몽땅 빠진 키세의 메일은 새삼 싸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분명 처음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도 이모티콘은 없었지만 이렇게 냉랭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카가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했다. 평소처럼 ㅇㅇ 단순한 자음 두 자를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가 화들짝 멈추고는 다시 두 손으로 정중하게 메일을 쳤다.
「응, 그날 휴일이야. 다음날까지 OFF」
보내자마자 1분도 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그날 만나요. 내가 해주길 바라는 거 다섯 개 생각해 오고」
뭐? 카가미는 갑작스러운 키세의 메일에 당황했다. 키세는 언제나 조금 제멋대로인 면이 있긴 했지만 이번처럼 당혹스럽기는 오랜만이었다. 키세, 우리 저번 주에 싸웠잖아…. 카가미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는 키세의 메일을 다시 읽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평소처럼 매우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이유였겠지. 하지만 이번엔 언제나와 다르게 자기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싸운 이유는 여전히 생각이 나질 않는데 자신이 벌떡 일어나는 순간 눈을 크게 뜬, 상처받은 키세의 얼굴만은 왠지 생각할수록 점점 선명해져서 카가미는 가슴이 쓰렸다. 그리고 그 싸움의 영향이 지금 카가미가 키세에게 전한 이틀의 휴일이었다. 키세와의 그 다툼이 있은 후로 연습과 훈련에 영 집중을 못하는 카가미에게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다.
「해주길 바라는 거?」
「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뭐든? 그 위험한 울림에 카가미가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 영양가 없는 망상을 지워버렸다. 키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제의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하지만 평상시처럼 대놓고 물어보기도 어쩐지 민망했다. 키세, 우린 저번 주에 싸웠다고. 비록 왜 싸웠는지는 까먹었지만. 카가미는 다시 물끄러미 키세의 메일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메일을 보냈을 키세가 생각나니까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연 좋은 상황인 걸까. 카가미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는 카가미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조금 버텨보고 싶었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왜 싸웠는지도 모르겠다보니 미안, 이라는 말을 내뱉기도 조금 그랬다. 조금 더 어렸다면, 앞뒤 볼 것 없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전할 수 있던 그때라면 조금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키세도 자신도 조금씩 안으로 끌어안는 부분이 많아졌다.
「아, 나도 다섯 개 요구할 거니까요. 다 들어줘야 함다. 이게 조건.」
그럼 그렇지. 카가미는 이어지는 키세의 메일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는 아무 조건 없이 무언가를 해주는 적이 별로 없던 키세이니만큼 카가미는 이런 메일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저녁이나 점심 식사를 대접한 후에는 꼭 농구 같이 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뭔가를 부탁하면 집에서 재워주기를 원했고 심지어는……아무튼 키세는 작든 크든 꼭 무언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 보답은 어느 때는 조금 난감할 때도 있고 어느 때는 매우 사소한 거일 때도 있었다. 이걸로 괜찮아? 하고 저절로 묻게 될 정도로. 키세와 긴 시간 지내다보니 그것도 나름 익숙해졌다.
「아침 10시, ○○역 앞」
키세의 메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용건만 간략하게 적은 것을 마지막으로 핸드폰은 침묵했다. 카가미는 알았다고 답신을 보낸 자기 메일에 5분이 넘도록 답장이 안 오는 것을 보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꺼내느라 조금 엉망이 된 로커를 정돈해 닫고 뒤를 돌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팀메이트들이 있었다.
“뭐…뭡니까?”
“애인에게서 메일?”
“아, 예…뭐.”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역시 애인이랑 대판한 거지?”
카가미는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대답을 회피했다. 남의 연애사에 신경 쓰지 마세요. 저지 지퍼를 올리며 갈 채비를 하자 이런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선배가 어깨에 팔을 턱하니 걸쳐온다. 고등학교 시절 키요시 선배만큼이나 키와 덩치가 있는 선배라서 천하의 카가미도 조금 휘청하게 된다. 카가미가 무겁다고 약한 소리를 하자 선배가 크게 웃었다. 옆에서 뒤늦게 준비를 마친 동기 중 하나가 카가미의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았다. 다시금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여서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던 카가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들에게 빙 둘러싸이고 말았다.
“지, 집에 안 가십니까?”
마치 청문회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쌍쌍의 눈동자들을 마주하면서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아~, 이 모두를 통솔하는, 팀의 캡틴이 친히 카가미 앞에 시선을 맞춰 앉았다. 요즘 부진해서 감독에게 특별휴가도 받은 에이스 군? 클러치 타임 들어간 휴가보다 무서운 새로운 주장을 마주하고 카가미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두에게 예쁨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카가미는 돋아난 소름들도 바들바들 떠는 기분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 *
카가미에게서 대략의 상황을 듣고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당연하게 모두들 애인이랑 사랑싸움 하냐고 놀려댈 것이라 생각했던 카가미는 서로 수군대며 눈치를 보는 동료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왜, 왜들 그러십니까?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내려앉은 분위기에 카가미가 울상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는 괜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니까 싫다. 언제나 작은 일로도 호들갑을 떠는 동료들이니만큼 이런 분위기도 나름 자기들끼리 짜고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배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카가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애인이 보냈다는 그 메일 말이야…그거 요즘 젊은 커플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Give&Take 이별 아니야?”
“네?”
“나도 친구들이랑 인터넷에서 들은 건데 이별을 결심한 쪽에서 서로 바라는 일 몇 가지씩 들어주자고. 그리고는 바라는 대로 다 들어주는 거야. 할 수 있는 정도, 라는 조건이 붙으니까 비싸거나 허황된 건 안 되고. 보통 옷을 잔뜩 사거나, 평소에 못 가보던 곳에 가거나 한데. 혹은 잔뜩 섹스 하거나. 야, 왜 경험 없는 고딩들 같은 반응이야, 이거. 미안, 얘기가 빠졌네? 아무튼 그 제안을 한 사람은 꼭 한 가지 바람은 마지막까지 남겨놓는대. 그리고 바라는 거 다 이룬 상대방이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말하는 거지. ‘제 마지막 바람입니다. 저와 헤어져 주세요.’”
“안 돼!!!!!!!”
우렁차게 튀어나온 카가미의 외침에 카가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쓰러지듯 귀를 막고 물러났다. 앞에서 얘기를 전해주던 선배와 주장도 한쪽 귀를 막고는 카가미를 째려보았다. 얌마! 고데시벨 뽑아낼 거면 미리 예고하고 뽑으라고!! 한 마디씩 타박을 늘어놓는 동료들 사이에서 카가미는 잔뜩 주눅 든 호랑이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구기는 카가미를 보면서 충격적인 이별 이벤트를 전해준 선배가 그 축 처진 어깨를 토닥였다.
“거, 걱정 마. 네 애인이 그렇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실제로도 그 이별 이벤트에서 따와서 연인들끼리 하루를 알차고 유익하게 보낸다는 얘기도 많고……응?”
그 후로도 카가미에게 많음 위로의 말이 건네졌지만 아쉽게도 카가미의 귀에는 제대로 입력되지 못했다. 카가미는 멍하니, 냉기가 느껴지던 키세의 메일을 떠올리곤 비척비척 집으로 갔다. 약속의 날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카가미는 며칠 혼이 빠져나간 호랑이 인형처럼 보냈다.
# #
그리고 대망의 약속 날.
카가미는 키세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꿈을 며칠에 걸쳐 이어서 꾸느라 이 중요한 날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카가미는 10시를 막 넘어가고 있는 시계를 발견하고 빛의 속도로 준비를 하고 튀어나갔다. 전날까지 뭘 입고 가야하나 고민했던 건 까맣게 잊고 평소처럼 편하게, 티셔츠에 카고바지를 입고 길이 잘 든 운동화까지 구겨 신고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그나마 ○○역이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이라 다행이었다. 카가미는 역에 가까워질수록 여성들이 한 방향을 보며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것을 보며 제 일행의 소재지를 알아차렸다. 보통 사람들이 약속장소로 자주 쓰는 만남의 광장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살짝 치우친 작은 나무 아래에 키세가 있었다.
얼마 전 화보를 찍으면서 입은 옷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서 사버렸다던 셔츠에 자신이 지나가는 투로 잘 어울린다고 말했던 갈색 조끼를 겹쳐 입고 키세의 늘씬한 다리를 더 부각시켜 주는 스키니를 입은 키세는 나름의 변장책으로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키세가 쓴 페도라부터 시작해서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빛을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리어 증폭. 간단하게 입은 듯하면서 나름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할 수 있는 계열로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키세의 아우라 덕분에 카가미는 키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가게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후줄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카가미가 아예 늦는다고 하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까 하고 고민하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이 환하게 빛났다.
“왜 다 왔으면서 여기 멀뚱히 서 있슴까?”
잠깐, 키세. 모델 포스 전력으로 펼친 너를 실물로 마주하는 건 아직도 조금 힘겹다. 카가미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를 앞에 두고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간만에 듣는 거 같은 목소리엔 생각만큼 날이 서 있지 않는데 과연 표정도 그럴지. 카가미는 불안한 심정을 끌어안고는 조심조심 눈을 떴다. 가까운 만큼 살짝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키세의 눈동자가 보였다. 카가미는 괜히 민망해서는 어흠, 헛기침을 했다. 늦어서 미안. 늦잠 잤어. 솔직하게 고했더니 키세가 슬며시 웃었다. 그럴 줄 알았슴다. 전화했는데도 안 받아서. 뒤늦게 확인한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 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꼴은 너무 심했슴다.”
“미, 미안.”
키세의 말에 카가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해도 키세와 자신의 복장에는 너무 크나큰 온도차가 존재했다. 아니 온도차라기보다는 신분차. 왕자와 거지같은 모양새. 카가미는 쭈뼛대며 키세를 보았다.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올게 조금만 기….
“내가 바라는 거 다섯 개 들어주기로 했죠? 일단 첫 번째.”
“어?”
“내가 데려가는 곳에서 투정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기.”
“뭐?”
일단 가요. 다짜고짜 자신의 손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한 키세 덕분에 볼썽사나운 몰골로 끌려가던 카가미는 종국엔 자신과 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게와 마주하게 되었다. 여성스러운 색채와 곡선으로 치장된 가게. 세련된 직원들이 입구부터 포진해 있는 그런 가게. 카가미는 가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저기, 키세…하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키세는 얌전히~알았져? 라고 다시금 자신의 바람을 강조하고는 익숙하게 여러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키세와 같이 이런 곳에 올 기회가 없던 카가미는 키세가 익숙하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을 보며 입만 헤에 벌리고 있었다.
“카가미 타이가 님?”
“어? 아니, 네?”
“코스 선택이 완료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카가미는 아담한 키의 여성이 안내하는 저 안쪽, 커튼으로 가려진 미지의 세계입구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키세를 돌아보았다. 키세는 어느덧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직원이 타주는 차를 마시며 제 자신이 표지인 잡지를 무릎 위에 얹고는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눈부셔서 카가미는 얌전, 얌전히…를 중얼거리며 최면에 걸린 듯 비척비척 여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얼굴에 처덕처덕 뭔가 발라주는 것은 키세에게도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코스는 처음이라서 카가미는 결국 중간에 잠이 들고 말았다. 설피 든 잠에서도 며칠 동안 카가미를 괴롭히던 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번 꿈에서 키세의 상대는 아오미네였다. 카가밋치, 저 아오미넷치랑 사귀기로 했슴다. 그러니까 헤어져요, 우리. 담담하게 고하는 키세의 음색에 꿈속의 자신은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목이 터져라 안 된다고 외쳐대는데 그 외침은 키세에게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꿈의 마지막은 언제나 키세가 웃으면서, 고마워요, 카가밋치. 카가밋치라면 분명 다른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을 검다. 하며 매번 바뀌는 상대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그리고 카가미는 언제나 그런 키세를 잡지 못하고 꿈에서 깨고 만다. 이번에도 그 공식은 변하지 않고….
“꺅!”
“어…….”
카가미는 꿈속의 키세 대신 현실의 갈색머리 여직원 팔을 잡으며 꿈에서 깨고 말았다. 직원은 높게 내지른 비명에 얼굴을 붉히며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혔다. 카가미는 민망해져서는 아니라고 저야말로 죄송하다고 팩을 하고 있는 얼굴 그대로 머리를 숙였다가 담당 직원에게 혼나고 말았다. 나왔더니 키세가 웃고 있었다. 자는 건 상관없지만 잠꼬대는 안 되죠. 노리코쨩이 엄청 놀랐다구요. 아 그 직원의 이름이 저건가 보다. 카가미는 키세의 웃음에 시무룩하면서도 키세의 음색이 나름 기색을 되찾은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냉랭한 기운이 많이 가신 느낌이었다. 카가미는 키세가 다시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까의 꿈을 털어내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가미는 어느새 다른 직원의 손에 잡혀 헤어살롱 입구를 지나가고 있었다.
“와아, 역시 내 안목. 그레이트 초이스.”
“괘, 괜찮냐?”
“괜찮냐구요? 너무 괜찮아서 안 괜찮다는 대답이면 어떨까요?”
“뭔 소린지 모르겠어.”
“우와, 생각 이상으로 정말 멋져서 내 심장이 진짜 안 괜찮아요. 책임져요, 카가밋치.”
난생 처음 해본 멋들어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카가미는 뻣뻣하게 앉아있었다. 다 됐다는 직원의 말에 바람처럼 카가미에게 날아온 키세는 어정쩡한 얼굴로 자신을 마주한 카가미를 보고 씩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어색하게 웃고 있어요. 평소처럼 멋지게 웃어봐요. 네? 자, 같이 거울 보면서 스마일~ 카가미의 어깨를 잡고 바로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눈을 맞추며 싱긋 미소 짓는 키세를 따라 카가미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더니 옆에 있던 직원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카가미에게 웃어주고 있던 거울 속의 키세가 휙 고개를 돌려 직원을 본다.
“멋지죠? 아까 들어오던 사람이랑 딴판이지 않슴까?”
직원과 같이 키득키득 웃는 키세는 카가미가 잘 모르는, 연예인의 세계를 살고 있는 키세 료타였다.
* *
“그럼 바로 이어서 다음 소원!”
“벌써?”
이제 막 에스테틱&헤어살롱을 나온 참인데 키세는 이제 막 불이 붙었는지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장장 몇 시간에 걸친 관리를 받고 진이 다 빠져버린 카가미가 난색을 표하자 모양 좋게 올라가 있던 키세의 눈썹이 축 처진다. 그럼 조금 쉴까여? 시무룩하게 말하는 키세의 기색에 카가미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아냐, 네가 기다리다가 지치지 않았을까 싶어서! 나는 언제든 괜찮아! 이제사 조금씩 밝아지는데 다시 담담냉랭해지는 건 사양이다. 그런 키세도 물론 예쁘지만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카가미는 키세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보며 키세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내가 완벽함다! 라고 할 때까지 어울려 주기!”
“어, 어어….”
카가미는 역시나 자신과는 연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휘황찬란한 옷가게를 앞에 두고 얼빠진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서로의 패션에 장난식으로 태클을 걸기는 했어도 자신은 그다지 패션에 빠삭한 편이 아니라 서로 편하게 마음에 드는 걸로 입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키세와 카가미는 옷쇼핑도 대부분 따로 하기 일쑤였다. 그 안에 서로의 취향이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좋은 거고. 그래서 카가미는 키세가 자신을 데리고 옷쇼핑을 온 것이 매우 낯설었다. 골라줘야 하나? 내가 키세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줄 수 있을까? 다 잘 어울릴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키세가 카가미를 불렀다. 키세는 양손 가득 옷 몇 벌을 들고 있었다. 카가미가 어, 그 옷은 너에겐 좀… 하는 생각을 말해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키세가 그 옷들을 카가미에 들려주었다.
“자, 얼른 들어가서 갈아입고 오십셔!”
“……안 어울…뭐?”
“탈의실은 이쪽임다!”
카가미는 그렇게 또 하얀색으로 도배된 탈의실에 갇히게 되었다. 겉에서부터 고급스러움으로 점철된 느낌이더니 탈의실도 생각보다 넓고, 쓸데없이 옷걸이도 고급스러워보였다. 정말 쓸데없이. 카가미는 일단 키세가 시킨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여러 벌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더니 셔츠부터 바지에 양말까지 빠짐없이 챙겨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갈아입고 나오자 마치 감정하듯이 홀로 팔짱을 끼고 아래위로 카가미를 훑어보던 키세는 다른 바지와 셔츠를 주고는 다시 탈의실로 쫓아 보냈다. 그런 교환을 수십 번을 더 하고나서야 키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이거 신으세여. 여러 번 신고 벗고 하느라 잔뜩 구겨진 운동화 옆에 키세는 날렵하게 생긴 구두 하나를 놓았다.
“분위기 있으면서 발도 편한 모델이니까 구두에 익숙하지 않은 카가밋치도 잘 신을 수 있을 검다.”
구두는 카가미에게 맞춘 듯 꼭 맞았다. 그렇게 갈아입는 동안 거울 한번 보지 못한 카가미는 키세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거울 앞에 키세와 나란히 설 수 있었다. 옆에서 직원이 입이 닳도록 둘을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제 옆에서 싱긋 웃고 있는 키세를 보고 있자니 소리가 차단된 듯 잘 들리질 않았다.
“봐요, 카가밋치. 멋지죠?”
아니, 키세의 목소리만은 잘만 들렸다. 카가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가 카가미의 굳은 어깨를 살살 쓸었다. 긴장하지 말구요. 옷에게 눌리면 안 됨다? 자 정면을 보고, 얼굴에 너무 힘주지 말구요. 네, 그 상태에서 부드럽게 미소. 귓가에 나직하게 울리는 키세의 목소리가 좋으면서도 낯설었다. 그 부드러운 울림에 이끌리듯 미소 짓자 키세가 맑게 웃었다.
멋져요, 카가밋치.
흥분하며 둘을 환송하는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둘은 거리로 나섰다. 키세가 세 번째 부탁으로 데이트를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카가미는 키세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해서 불안하기만 했다. 옷가게에서 완전히 제 기분을 찾은 키세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며 카가미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제 기분 찾기 전에도 어느 정도 휘두르고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데이트만 하더라도, 카가미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냥 키세만 보고 키세가 웃으면 좋구나 했다가, 키세가 부루퉁하면 가슴이 내려앉았다가 키세가 즐거워하면 기쁘구나, 그런 감정적인 면을 느끼기에 바빴다. 그 정신 한 구석에선 선배가 말한 ‘행복감에 젖어 있으면 그때 말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카가미는 키세로 인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행복이 무서웠다. 어느 순간 빵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란히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키세가 말을 걸었다.
“느껴짐까, 카가밋치?”
“뭐가?”
“저기 여자들이 카가밋치 보고 있슴다.”
즐거운 듯 웃는 키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카페에 있던 몇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메뉴판을 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기도 그렇고. 이번엔 키세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나무 아래에 멈춰 서서 대화를 하던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키세 널 보는 게 아니고?”
키세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곤 카가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잠시 혼자 있어 봐요. 난 가서 마실 것 좀 사올 테니까. 손을 흔들면서 카가미의 시야에서 키세가 사라지고 얼마가 지났을까, 무료함을 못 이겨 폰으로 쿠로코와 메일을 하고 있는데 아까 봤던 여성들과는 다른 여성 둘이 카가미에게 다가왔다.
“저기….”
“엉?”
“저기, 죄송한데 혹시 모델 같은 거 하시나요?”
“아니, 아닌데요.”
카가미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는 그럼 연락처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카가미는 당황했다. 키세가 자주 겪는 건 봤지만 그런 상황을 자신이 겪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카가미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물러나 앉으며 난색을 표했다. 여성들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 사진은요?! 그것까지 거절하면 다음엔 또 무얼 들고 나올지 두려워져서 카가미는 한 장만이라고 조건을 걸고 찍혀주었다. 농구선수로서 종종 기자에게 찍힐 때도 있고 팬들과 찍을 때도 있지만 저 샤랄랄라 쉬폰 원피스에 형형색색의 네일을 한 여성 둘이 농구를 관람하러 다닐 거 같지는 않아서 카가미는 기분이 매우 묘했다. 날 모르는데 왜 찍자고 한 걸까. 연락처는 왜? 카가미 혼자 그렇게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선구자 여성들의 도전을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어디선가 다른 여성들의 무리가 카가미에게 말을 걸었다. 카가미는 정말로 난처해졌다. 이 상태에서 키세까지 오면 난리가 나는 것은 아닐까. 이 옷을 입고 전력질주가 가능할까, 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세주처럼 카가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마실 것을 구하러 어디까지 간 건지 모를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너 어디야?!”
[헌팅 받는 기분이 어떰까, 카가밋치?]
“뭐?! 헌팅?!”
앞에 있던 여자들이 깜짝 놀라더니 몇몇은 까르르 웃었다. 이 오빠 몰랐나 봐. 귀여운 면도 있다~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카가미는 그 인간 울타리를 빠져나와 달렸다. 너 지금 어디야?!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는 키세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봤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그는 카가미가 있던 벤치가 아주 잘 보이는 어느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나 놀리니까 재밌냐?”
“놀린 거 아님다? 카가밋치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거 뿐.”
카가미는 그게 무슨 소리야. 표정만으로 그렇게 물어보며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아이스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키세는 그런 카가미를 흐뭇하게, 또는 아련하게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괬다. 한쪽 턱을 괴고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키세의 시선에 카가미는 괜히 얼굴에 열이 올라 내려놓았던 잔을 다시 들어 커피를 마셨다.
“카가밋치는 자상하고 잘생겼으니까, 분명 여자들에게도 인기 많을 검다.”
“…키세?”
“많은 여자들이 결혼은 분명 나 같은 남자보단 카가밋치 같은 남자랑 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어이, 키세…갑자기 그게 무슨….”
한없이 부풀어 오른 행복감이 곧 터질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밀어놓았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뻗쳐올랐다. 어딘가 가라앉은 키세의 시선이 날카롭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저 말을 끝내고 그러니까 카가밋치를 이제 놓아주겠다는 말을 꺼낼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어른스러운 키세의 표정은 마치 제 마음에 두꺼운 벽을 쳐놓은 것처럼 속내를 알기가 어려웠다. 모델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이면서 쓸데없는 것만 배워오고. 카가미는 마지막 남은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키세가 팔을 내리곤 카가미에게 가까워지려는 듯 몸을 내밀었다.
“그래도 역시 지금은 제 인기가 쪼금 더 높으려나?”
일부러 밝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도리어 가슴이 쓰렸다. 자신은 꿈속에서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키세를 놓아줘야할까. 키세가 마지막 바람으로 이별이라는 카드를 내놓는다면 자신은 그 카드를 받아 쥘 수 있을까. 결론은 생각하기도 전에 나와 있었다.
“그럼 다음은 뭐야?”
“이제 다음은 카가밋치의 턴임다.”
“괜히 생각하기 복잡하니까 한 사람씩 몰아서 끝내버리면 안 되냐?”
“우와, 카가밋치 무드란 걸 좀 생각해요. 뭐 그런 점도 단순무식해서 귀엽지만.”
자신은 지금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고 있는데 단순무식이라니. 키세의 말에 순간 울컥했지만 카가미는 아직 남아있는 얼음의 잔재를 씹으며 버텼다. 소원을 다 써버리게 만들면 헤어지자고 말 못 하지 않을까. 실로 단순무식한 생각이었다. 키세는 카가미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부드럽게 흐르는 키세의 말에 카가미가 속으로 내심 안도하는 순간.
“그럼 네 번째. 내 마지막 소원은 카가밋치가 원하는 다섯 가지를 다 이루고 난 다음으로 하기.”
“……야.”
“이제 카가밋치 차례임다. 뭐든지 할게요.”
예쁘게 웃는 키세의 미소가 어쩐지 무섭고 슬펐다.
# #
“정말 이걸로 괜찮슴까?”
“내가 원하는 거면 뭐든 괜찮다며.”
“그건 그랬지만.”
이러면 평소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고. 드디어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선글라스를 벗은 키세가 익숙하게 거실 테이블에 자신의 페도라와 선글라스를 올려두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카가미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곤 앞치마를 했다. 벌써 저녁 준비? 의아하게 묻는 키세에게 배고파. 라고 간단하게 전한 카가미는 갑갑한 셔츠 단추도 두 개 풀고 본격적으로 요리에 돌입했다. 그리고 곧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 방금 샷 대박.”
핸드폰으로 자신을 찍고 있는 키세가 있었다. 카가미는 괜히 부끄러워져 저도 모르게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찍지 마. 키세는 그저 웃었다. 그건 두 번째 소원? 키세의 말에 카가미는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젓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키세는 다시 카가밋치 그렇게 귀여워서 어떡함까~라며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그날 저녁은 어떤 날보다 푸짐하고 맛있었다. 키세는 매우 만족해하면서 카가미의 등에 매달렸다. 평소라면 덥고 무겁다며 투덜거릴 카가미였지만 오늘은 말없이 키세의 매달림을 버텼다. 키세가 오늘은 카가밋치 체력 만땅인가 봄다? 하면서 먼저 떨어져 나갔다. 카가미는 갑자기 가벼워진 어깨가 못내 아쉬웠다.
뒷정리는 키세가 도와서 금세 끝났다. 키세는 뒷정리를 하면서도 내심 카가미에게 얼른, 얼른 다음 부탁. 하는 시선을 보냈다. 카가미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일단 씻자고 했다. 키세의 여벌옷은 따로 서랍을 하나 쓸 정도로 있었다. 만약 헤어지게 되면 이 서랍도 텅 비게 되는 걸까. 아니면 옷은 됐다고 놓고 가려나. 키세에게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려고 열었다가 괜히 감정적인 된 카가미가 절로 시큰해진 코를 한번 쓱 훑었다.
“아, 와일드하면서 댄디하던 카가밋치가 사라졌다.”
와일드하면서 댄디하다는 건 대체 무슨 스타일인 걸까. 별 도움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카가미는 아쉬워하는 키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자신의 머리는 키세가 잘 말려주고 영양젤도 잘 발라준 상태. 조심스럽게 머리를 말려주는 카가미의 손길에 키세가 나른한 음성을 흘렸다. 카가밋치 손길 기분 좋아서 잠들 거 같슴다~ 카가미는 그 말에 큰 손으로 키세의 머리칼을 휙휙 뒤집었다. 아직 자면 안 돼. 머릿결 상한다고 갹갹대던 키세가 스스로 머리를 정돈하면서 웃었다. 그렇죠. 카가밋치가 원하는 거 아직 하나밖에 안 들어줬고.
집데이트는 재밌었어요?
키세가 카가미의 가슴에 기대며 물었다. 저녁 먹고 목욕한 거밖에 없긴 했지만. 카가미는 평소에도 자주 겪은 이 경험들이 갑자기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 카가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키세를 내려다보았다. 키세.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키세가 의아한 듯 카가미를 올려다본다.
키스 해줘.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잠시 머뭇거리던 키세는 조심스럽게 카가미에게 다가갔다. 수줍게 와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곧바로 다시 붙었다. 깊게 이어지는 입맞춤. 키세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올려 카가미의 어깨를 감쌌다. 각도를 바꿔 혀를 얽자 뜨거운 키스를 여러 차례 겪은 몸이 벌써부터 흥분을 피워간다. 키세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카가미의 입술을, 혀를, 뜨거운 감정을 덮고 품었다. 서로의 손이 서로를 얼싸 안고 입안을 탐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카가미의 손이 움찔움찔 흔들리기 시작한 키세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었다. 흐읏, 갑작스러운 터치에 키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키스, 멈추지 말고…….”
흥분으로 낮아진 카가미의 목소리에 키세가 움찔하면서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응응, 우응! 확실하게 열을 담은 신음이 꽉 맞물린 입새에서 쉼 없이 흘렀다. 키세의 몸을 더듬는 카가미의 손길에도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자신의 기대고 있던 침대 위로 키세를 올려 눕히고는 흥분으로 물든 키세와 다시 깊게 키스했다. 카가미 쪽에서 먼저 떨어지는 것으로 키스의 종료를 알리자 키세가 몽롱하게 풀린 눈을 접으며 웃었다.
“두 번째부터 이런 소원이 나오리라곤 생각 못했슴다. 카가밋치 보기보다……, 아…!”
“세 번째. 오늘은 다 나에게 맡겨 줘. 넌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히읏, 아…! 카가밋, 치?”
벌써부터 카가미의 애무에 당황해 하는 키세의 손을 깍지 껴 잡고는 카가미는 진지한 얼굴로 키세를 바라보았다. 카가미의 눈동자도 흥분과 쾌감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에게 흥분한 카가미의 시선에 키세도 오싹, 전신을 훑는 기대감과 쾌감을 느꼈다. 잡아먹힐 거 같은데 왜 기분이 좋은 걸까. 키세는 흥분으로 호흡이 가빠지는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카가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키세의 귀에 촉, 립키스를 남겼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키세의 몸은 그 작은 접촉에도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네 번째.”
“네…. 뭐든지.”
지금이라면 심장이라도 뽑아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슴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키세는 숨을 몰아쉬며 바르작거렸다. 귀에 낮게 울리는 카가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왤까, 귀에 속삭이며 한 적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보송보송한 침대 시트를 꼭 쥐면서 키세는 생각했다.
“오늘은 키세, 네 안에 하게 해줘.”
키세는 생각지도 못한 카가미의 말에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카가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곧게 키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 같다. 키세는 혀를 내밀어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천천히 카가미의 팔을 놓았다.
“뒤처리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내가 만족할 때까지. 네 안에 싸게 해줘.”
어쩐지 카가미가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키세는 앞뒤 볼 것도 없이 카가미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세의 무언의 긍정을 알아들었는지 그때부터 다시 격렬해진 카가미의 애무에 키세는 그저 헐떡이고 신음하며 온몸을 쾌감의 바다에 담그고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키세는 난생 처음, 온몸으로 느꼈다.
* *
“키세, 키세?”
“하으, 카가, 밋치.”
“괜찮아?”
“……아직도 허벅지랑 허리가 떨려서…아, 으응.”
생전 처음 겪은 과도한 쾌감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키세는 그럼에도 가시지 않은 쾌감의 여운에 아직도 떨고 있었다. 카가미의 팔을 베고 누워 카가미가 해주던 후희를 받던 키세는 푸흣 웃었다.
“카가밋치 이렇게 과격하게 몰아붙일 수도 있으면서 왜 지금까진 답답할 정도로 정중하게만 했슴까? 어쩐지 조금 손해 본 기분.”
“그야, 그랬다가 너 다치면 큰일이니까….”
카가미는 마치 앞으로는 못할 거처럼 아쉬운 티를 내는 키세의 태도에 다시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지 마, 키세. 네가 좋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줄 테니까. 제발 이 다음은 없을 것처럼 얘기하지 마.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키세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힘에 키세가 의아한 듯 카가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그나저나 카가밋치, 마지막 소원. 몸 써야하는 검까? 그럼 지금 이 상태에서는 조금 무리. 허리에 힘 안 들어가서 도저히 안 되겠슴다.”
“괜찮아. 언제든 들어줄 수 있는 거니까.”
“아 그러면 지금 들어줄 수도 있다는 검까? 뭔데여? 아, 오늘 벌써 한 시간도 안 남았슴다, 카가밋치 얼른!”
오늘 중으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는 걸까.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다는 걸까. 카가미는 아까 뻗쳐올라 제 자신을 옭아매기 시작한 불안감이 더 강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 날카로운 줄기는 결국 카가미의 무언가를 터뜨려버렸다.
“카, 카가밋치? 갑자기, 갑자기 왜 우는 검까?! 으앗, 잠깐 나 허리 못 드니까 고개 좀 숙여 봐요. 왜 울어여? 설마 팔 저림까? 그러게 왜 멋진 척을 해서는……어?”
“키세…….”
“카, 카가밋치…?”
키세는 다시 자신을 눕히고 그 위에 덮치듯 올라탄 카가미를 올려다보며 눈만 두어 번 껌뻑였다. 카가미의 눈물이 뚝뚝, 키세의 볼 위로 떨어져 내렸다. 키세는 자신의 볼을 닦기보다는 팔을 뻗어 카가미의 눈가를 매만져 주었다. 하지만 눈물은 그런 키세의 손가락을 타고 더더욱 흘러내릴 뿐이었다. 크나큰 개에게 쫓겼을 때 말고는 카가미의 눈물을 본 적이 없는 키세는 가슴 절절한 카가미의 눈물에 저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카가밋치, 울지 마요. 네? 왜 그래요, 진짜. 속상한 마음을 담아 말하자 카가미가 고개를 내려 키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내 마지막, 다섯 번째…….”
네, 뭐든 괜찮으니까 말해여. 난 괜찮으니까. 키세는 어린애처럼 크흡대며 울음을 참으려는 카가미의 팔을 도닥였다. 카가미는 그래도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키세를 보았다. 카가미는 자신의 팔을 다독이는 키세의 양손을 꼭 잡았다.
“나랑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자.”
“……카가밋치.”
“헤어지자는 네 마지막 소원 안 들어줄 거니까.”
“잠깐, 카가밋치.”
“나랑 평생…….”
“지금 여기서 헤어진다는 얘기가 왜 나옴까?!!!”
“으억!!!”
겨우 수습되어 가던 카가미의 눈물샘은 어떻게 풀어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카가미의 손에서 벗어나 그의 미간 사이를 정확히 때린 키세의 주먹에 의해서 다시 터지고 말았다.
* *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마지막에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다 이검까?”
“…네.”
카가미는 발개진 눈가로 힐끔힐끔 키세의 눈치를 살피다가 키세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흠칫 몸을 경직시키며 다시 바닥을 보았다. 키세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벌렁 드러누워 고개만 카가미 쪽으로 돌렸다. 카가미는 키세에게 맞고 나가떨어져 홀딱 벗은 채 침대 아래에 무릎 꿇고 있는 상태였다. 카가미는 키세의 반응으로 자신이 얼토당토 않는 오해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선배, 선배…휴일 끝나고 다시 나가면 치즈버거 뜯어낼 거야. 잔뜩. 구시렁구시렁 선배의 원망을 하던 카가미는 다시 쭈뼛거리며 키세를 살폈다. 키세는 어이구 저 화상을 어쩌면 좋아. 하는 시선으로 카가미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키세, 네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건….”
“지금 이 분위기에, 이 기분으로 말하라구여?”
“미, 미안.”
카가미는 다른 의미로 울고 싶어졌다. 다리도 저려오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거 같은 키세를 두고 차마 아프다고 할 수가 없어서 카가미는 그 큰 덩치를 움찔거리며 필사적으로 참을 뿐이었다. 키세는 침대 위에서 그 꼴을 다 보면서 속으로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음색으로 카가미를 불렀다. 잔뜩 혼난 개가 주인이 부른 소리를 들은 것처럼 카가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럼 카가밋치는 내가 오늘 왜 그런 이벤트를 했는지 모른다는 거네여? 아니 뭐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미안…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며 카가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세는 힘겹게 몸을 굴려서 침대에 엎드렸다. 자신의 팔을 겹쳐 베고 카가미를 본 키세는 빙긋 웃었다. 오늘 우리 둘의 기념일인데. 카가미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기념일? 네, 기념일.
무슨 날일까. 사귀기로 한 날도 아니고 자신이 키세에게 고백한 날도 아니고 7주년은 아직 조금 남았고…….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지 카가미의 표정이 대단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키세는 웃었다. 허리가 아파서 금방 멈췄지만. 힌트 줄게요 힌트. 얼른 구원을 바라는 듯 울망울망하게 변한 카가미의 표정을 보면서 키세는 웃었다. 카가밋치 지금 있는 팀에서 등번호 몇 번? 엉? 너도 알잖아. 5번인 거. 물론 잘 알죠~키세는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는 카가미에게 그저 웃어 주었다. 그럼…아, 다행이다. 아직 12시 안 지났어. 오늘은 몇 월 며칠?
“10월…7일.”
“잘 생각해 봐여. 검증된 바보인 카가밋치를 위해 더 힌트를 말하자면 중학생 때는 카가밋치가 팀 농구를 안 했고, 지금은 내가 안 함다.”
이정도 말하면 천하의 카가밋치도 알겠져? 맑게 웃는 키세를 보고 카가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등번호 얘기를 듣고 날짜 얘기까지 들으니까 확실하게 그림이 보였다. 어느 날 키세가 고등학교 시절 둘이 나란히 유니폼 입고 등을 보이고 찍은 사진을 보며 가을이 기다려지네요, 하고 혼자 흐뭇해하던 사실이 덩달아 떠올랐다. 카가미는 점점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다리가 저리고 자시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키세에게 미안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마구잡이로 엉켜서 정신이 없었다. 카가미는 슬슬 키세 눈치를 보다가 재빠르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허리 아프다고 낑낑대는 키세를 돌려서 꼭 껴안고 얼굴을 비비자 키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감아온다.
“키세.”
“네?”
“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바라던 건 뭐였어?”
“음, 그건 죽기 전에 카가밋치에게 말해야 할 거 같은데여.”
카가밋치 소원 들어주려면 평생 사랑해야하니까 내 소원 빌 시간이 없겠네여. 키세가 놀리듯이 혀를 내밀고 낄낄 웃었다. 카가미가 그러지 말라는 듯 키세의 귀를 잘근 씹었다. 키세가 흠칫 놀라며 카가미의 등을 쳤다. 하지만 그 주먹엔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잘근대던 카가미의 입놀림이 끈적하게 바뀌자 키세가 앗, 고개를 젖히며 숨을 내쉬었다. 안 됨다. 더 이상은 무리……. 괜찮아. 끝까지 안 가. 네가 마지막으로 말하려고 한 거 말해주면. 키세가 카가미의 어깨를 꾹 쥐면서 열에 들뜬 웃음을 흘렸다. 하아, 못 당하겠네여 진짜. 화답하듯 카가미의 귓가에 촉 립키스를 남긴 키세가 작게 속삭였다.
료타라고 불러줘여. 타이가.
시계바늘이 모두 12시를 가리켰다.
정말 급하게 끝냈는데 나름 괜찮게 나온 것도 같고 중간 부분 매우 많이 스킵을 해버려서 조금 아쉽기도 하고 그런 글. 화황 첫 연성글이었다. 단문연성은 너무 단발성이어서 연성이라고 부르기가 매우 부끄러우므로...본격적인 화황 첫 글은 이 글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와, 사실 쿠로바스 관련으로는 죄다 썰밖에 없었는데 올 화황데이도 그대로 보내면 내년엔 더더욱 못 챙겨줄 거 같아서 진짜 잠 포기하고 썼다.
연성은 진짜 울면서 썼던 디지몬 앤솔원고 이후로 처음이어서 완전 버벅였다. 소설을 어떻게 썼었는지 싸그리 잊어버린 느낌. 그래도 생각한 부분들은 얼추 다 글에 넣을 수 있어서 좋았다. 쵱컵 글을 썼다는 거에 크나큰 의의가 있는 거다ㅠㅠㅠ쵱컵데이에 첫 쵱컵 글. 흑흑흑흑흑ㅠㅠㅠㅠㅠㅠ앞뒤 개연성 다 잘라먹었지만 그런 부분들은 읽는 분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끼워 맞춰졌으리라 믿으며... 사실 둘이 저번 주에 싸운 얘기도 시간이 있었다면 적절하게 넣었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액기스만 뙇! 젠장 화황 행쇼!!!!!ㅠㅠㅠㅠ
급하게 전날ㅋㅋㅋㅋ쏠메 친구에게 키워드를 받아서 썼는데 키워드 안 보임. 여기서만 밝혀두는 키워드는 '바람' 이다. 어느 바람인지는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해서 '바라다'의 명사형으로 갔음. 하지만 안 보임´_`ㅋㅋㅋㅋㅋ
'새로 산 공책 > 패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쿠로코의 농구/ 녹황] 바보 (0) | 2014.03.13 |
---|---|
: MSN단문 모음 002(P) (0) | 2012.11.09 |
: MSN단문 모음 001(P) (0) | 2012.11.09 |
: 조각글 001 - 듀라라라 (0) | 2012.09.26 |
구슬동자-흑백흑 썰 (Pass:My Birthday) (0) | 2012.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