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코의 농구]
미도리마 신타로 x 키세 료타
녹황 綠黃
키세 료타는 멍하니 벤치에 앉아서 어지러이 공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눈을 반짝이면서 선수 면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좇을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멍했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건지 이성적으론 이해를 했는데 감정으론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괴리였다. 키세는 다시 농구 코트를 보았다. 자신이 주로 속해 있는 카이조의 유니폼은 기본 푸른색이었다. 바다를 닮은 짙은 청색. 자신이 동경하는 이를 닮은 색이기도 했다. 혹은 흰색 바탕에 그 푸름이 적절하게 들어간 것.
그런데 지금 이 열기 가득한 코트에 가득한 것은.
“슈토쿠!! 슈토쿠!!”
바다와 같은 푸른빛이 아니라 노을의 따스함을 안고 있는 듯한 그런 주홍빛. 그리고 그 사이에 드문드문 피어난 잡초와도 같은 쑥색 빛이었다.
키세는 지금 슈토쿠와 어느 학교가 가지고 있는 연습경기의 현장에 와 있었다. 그것도 2층의 작게 마련된 관람석이 아니라 시합의 열기가 곧바로 느껴지는 슈토쿠 진영 벤치에. 키세는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은 슈토쿠의 감독을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가 얼른 코트로 고개를 돌렸다. 막 미도리마의 아름다운 삼점슛이 터진 참이었다. 2층을 어느 정도 채운 슈토쿠의 응원단이 환호를 보내는 와중에도 미도리마는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정돈하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뿐이었다.
여전히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폼이네요.
키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가까운 위치에서 그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분석하겠다는 일념으로 집중하여 보기 시작했다. 순간 미도리마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던 것 같았지만 키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내 고개를 돌려 총총히 뛰어간다. 힘내십쇼. 피식, 웃으며 키세는 미도리마에게 들리지 않을 응원을 중얼거렸다. 뭐 자신의 응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키세는 이미 큰 차이가 벌어진 점수판을 바라보고는 그럼 그렇지 하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화보 촬영에서 스타일리스트가 고생했다고 선물로 준 심플한 목걸이가 가슴 부분에서 찰랑였다.
그랬다. 지금 키세는 퇴근 중에 미도리마에게 잡혀서 억지로 이 연습경기장에 끌려온 것이다. 농구부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만큼 농구부의 연습시합이나 훈련일정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키세의 스케줄은 보통 모델일에 투자되곤 했다. 그것이 사무소와 약속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히 키세의 일정은 주말, 그것도 오전에 있는 연습이 끝나고 난 오후나 새벽에 이루어지곤 했다. 일요일엔 보통 연습이 없지만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연습과 개인 로드워크가 있기 때문에 키세는 되도록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전에 잡힌 일을 자주 받곤 했다. 개중에는 이번처럼 밤을 투자해서 이루어지는 작업도 있었다. 촬영 장소를 빌리는데 어려웠다거나 감독의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거나, 이유는 언제나 달라졌지만. 키세 자신이 현역 운동선수인 만큼 체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어 이런 철야 작업에도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임할 수 있었지만 정말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올시다였다.
그날의 팀 분위기가 좋다고 언제나 이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촬영장의 분위기가 좋다고 결과물까지 좋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지친 기색이 촬영장에 깔리게 된다. 키세는 그런 분위기에 저까지 피곤에 눅직눅진 절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밤샘 촬영을 하고서는 매우 오래간만에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게 들었던 촬영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힘겹게 집 앞에 당도했을 무렵,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었다.
“무엇을 했길래 이 시간에 집에 돌아오냐는 것이다.”
“……미도리, 맛치?”
키세는 순간 자신이 너무 피로하여 집 앞에서 잠깐 존 것은 아닌가 싶어 얼른 눈을 비벼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보아도 주홍빛 저지를 입은, 녹색머리의 남자는 사라지지 않고 슬쩍 찌푸린 표정으로 키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키세는 정말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 미도리마가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조금 짜증이 쌓여있고, 피곤한 거 같은 몰골로. 그렇게 아주 잠시간 키세와 미도리마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데 미도리마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키세가 놀랐잖아, 힘든 건 알겠지만 얼른 제대로 설명부터 하라고.”
“너무 붙지 말라는 것이다, 타카오.”
미도리마는 자신에게 웃으면서 다가선 타카오를 피해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조금 더 키세와 가까워지게 된 미도리마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세의 시선에 잠시 멈칫 하더니 시선을 내리며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하루 나와 같이 있어달라는 것이다.”
“미도리맛치 오늘 뭔가 잘못 먹었슴까?”
미도리마 뒤에서 타카오가 배를 잡고, 입을 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키세는 가뜩이나 피곤한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마주해서 기분이 조금 예민해진 상태였다. 미도리마의 밑도 끝도 없는 설명에 전혀 상황이 이해되지 못한 키세는 자신의 앞을 막고 선 미도리마의 몸을 가볍게 밀치며 문의 비번을 눌렀다.
“잠깐, 키세…! 내 말을 좀 들, 억!”
“으악, 미,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아, 안경 괜찮슴까?!”
키세가 매우 익숙하게 현관문을 여는 것과 키세에게 밀쳐졌던 미도리마가 다급하게 다시 키세에게 달려들었던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 울려 퍼지는 둔탁한 타격음에 한 명은 신음하고 한 명은 당황하고 또 한 명은 주저앉아 웃었다. 하필 현관문에 옆통수를 박게 된 미도리마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당황한 키세의 손을 잡았다.
“네가 나와 있어주지 않으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매우 간절하고 진지한 미도리마의 시선과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악력에 잠시 멍해진 키세는 피로에 찌든 머리를 필사적으로 돌렸다. 뒤에서 헉헉대며 눈물을 닦고 있는 타카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나름 만신창이인 미도리마. 그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테이핑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 당연하게 있어야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설마 그것을 가방 안에 안 보이게 넣고 다닐 리가 없었다. 중학생 때도 야한 잡지가 럭키 아이템이라고 당당하게 들고 다녔던 그였다. 물론 교무실로 한두 번 불려가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은 왜? 키세는 당연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미도리맛치, 오늘의 럭키 아이템은여?”
미도리마의 표정이 암담함에 물듦과 동시에 뒤에서 헉헉대던 타카오가 다시 벽에 기대서 웃기 시작했다. 지금이 나름 늦은 오전이라 다행이지 완전 이른 시각이었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이웃에게서 항의가 들어올 것이었다. 키세는 얼른 일어나 다시 문을 열었다. 키세의 손을 잡고 있던 미도리마도 따라 일어났다.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여.”
“참, 키세 오늘 이후에 일 또 있어?”
“아뇨, 방금 끝나서 없슴다. 그래서 집에서 쉬려구요. 그런데 그건 왜여?”
“오늘 연습시합에 같이 가주었으면 한다.”
“뭐라고요?”
“자세한 설명은 시합이 끝나고 난 다음에 하겠다는 것이다.”
타카오의 질문에 키세가 일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용건을 던진 미도리마는 키세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잡아끌고 서둘러 내려갔다. 아까부터 맨션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키세를 밀어 넣은 미도리마는 완전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따라오는 타카오에게 다른 차 타고 오라고 했다가 키세에게 맞았다. 미도리마는 뭔가 서러움이 많이 담긴 얼굴로 키세를 바라보았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결국 타카오는 낄낄 웃으면서 앞좌석에 앉게 되었다. 키세는 되도록 타카오와 멀어지려는 듯 문에 바짝 붙어 앉은 미도리마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도리마는 여전히 키세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그 맞닿은 살결 사이에 촉촉하고 뜨겁게 땀이 배일만큼. 키세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미도리마 말고 타카오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 건지. 타카오는 큭큭 웃으면서 키세를 가리켰다. 오늘은 네가 신쨩의 럭키 아이템인 거야. 키세는 이해한 듯 아닌 듯 애매한 숨을 뱉어냈다. 미도리마의 태도로 대충 그렇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런 대답을 들으니까 뭔가 미묘하고도 이상했다. 하지만 역시 럭키 아이템에 대한 믿음이 쓸데없을 정도로 강한 미도리마니까, 키세는 너그러운 자신이 조금 이해해주고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에 이런 상황에 이런 저런 토를 달 정도의 기운도 없으니까.
“피곤한가?”
키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슈토쿠의 감독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키세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 혹시 저 졸았슴까? 괜찮네, 아마 나밖에 몰랐을 거야.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조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키세의 얼굴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잠시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나 기억을 되짚어 갔을 뿐이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졸아버리다니. 키세는 괜히 민망하여 어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자신이 잠시 존 사이에도 슈토쿠의 에이스는 열심히 인사를 다했는지 점수 차는 이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상대편에게 심심한 위로를 마음속으로 건네며 키세는 조심스럽게 감독에게 물었다.
“타학교의 에이스인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검까?”
“딱히 문제될 것도 없지.”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힐끔 다른 부원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이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의사가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너무 신경이 쓰여서 나오는 반증 같은 행동일 수도 있었다. 키세는 아주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발장난을 했다.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걸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우리 에이스가 부탁해서 다들 저러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미도리맛치가요?”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남에게 부탁이란 것을 했다고? 키세는 순간 매우 놀라운 것을 들었다는 것을 표정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감독은 그런 키세에게 미도리마에게만 통용되는 이 팀의 룰을 설명했다. 제멋대로인 요구 세 가지를 무조건 들어준다는 말에 키세는 부럽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가 자신이 그걸 요구한다면 가장 먼저 온 몸을 날릴 것 같은 누군가를 떠올리곤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멋대로 요구를 하다가는 자신의 신체가 제멋대로 구겨질 거 같아서. 그래서 키세는 그런 생각을 얼른 지워버리곤 흥미로운 표정으로 감독을 돌아보았다.
“그럼 아직 두 개 남아있슴까? 평소엔 어떤 요구를 주로 함까?”
“이미 다 써버렸다. 너를 데리러 간다고 집합시간에 늦는다는 게 첫 번째, 너를 이 벤치에 앉힌다는 게 두 번째, 그리고 네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조심해달라는 게 세 번째였어.”
키세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천하의 미도리마가 자신을 위해서 모든 요구를 다 썼다는 걸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요구를 들어준 감독에게서 들었는데도 쉽사리 믿겨지질 않았다. 키세는 잠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벤치를 잡고 있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미도리마가 어떤 표정으로 저런 요구를 가장한 부탁을 했을지 상상하다가 그만 두었다. 헛된 망상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키세는 미도리마가 평소에 하는 제멋대로 요구를 전해 듣고 웃었다. 우와, 나도 하고 싶다. 말하자마자 차일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키세는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의 웃음소리에 부원들 중 몇몇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걸 보고 키세는 싱긋 그들에게 웃어주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잘못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었지만 키세는 개의치 않았다. 타지에 나온 여행객의 마인드로 조금 더 이 팀의 분위기를 느끼다 가고 싶었다. 쿠로콧치도 그렇지만 미도리맛치도 좋은 팀에 있군요, 다행임다. 절대 소리 내어 전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키세는 다시금 아름답게 포물선을 그리는 공을 눈으로 좇았다. 천장에 달린 조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시합이 끝나고 후끈 달아오른 선수들에게 다른 부원들과 매니저가 수건과 음료수를 전해주었다. 미리 미도리마의 수건과 음료수를 건네받았던 키세는 시합이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어 앉는 미도리마에게 그것을 전해 주었다. 미도리마는 살짝 커진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매니저를 돌아보곤 반 박자 늦게 키세의 손에서 수건을 채갔다.
“누가 시킨 거 아님다?”
“뭐가.”
“방금 네가 시킨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매니저 쳐다본 거 다 암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미도리맛치 끝나자마자 나한테 올 거니까 나한테 맡기면 된다고 내가 그런 검다.”
미도리마는 말없이 수건에 얼굴을 묻고 손만 움직일 뿐이었다.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타카오가 킥킥 웃으면서 키세에게 다가왔다. 모델 친구가 수건이랑 음료수도 챙겨주고 참 좋네, 비록 남자지만. 미도리마가 그 말에 수건에서 얼굴을 떼곤 타카오를 노려보았다. 키세는 넉살좋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남자인 모델 친구에게 수건 받고 싶슴까? 타카오는 낄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땀을 다 닦은 미도리마는 왼손으로 키세의 오른손을 꼭 잡고는 심드렁한 투로 타카오에게 고했다. 얼른 다른 곳으로 가버리라고. 타카오는 놀리듯이 휘파람을 휘휘 불고는 괜히 키세의 잘 정돈된 머리를 흐트러뜨리곤 선배들에게 가버렸다. 동년배의 친구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이 기적의 세대들을 제외하곤 매우 오랜만이었던 키세는 기분이 나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또 웃었다. 좋은 친구랑 한 팀이라 좋겠네요, 미도리맛치. 예의상 건넨 말에 미도리마는 콧방귀를 뀌면서 예상대로 투덜대는 답을 돌려주었다. 미도리마다운 대답이라 키세는 또 웃었다. 그렇게 주변에서 우왕좌왕 갈 준비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데도 미도리마는 잠시 묵묵히 키세의 손을 잡은 채 앉아 있었다.
“미도리맛치, 테이핑 안 함까?”
그 잠시간의 접촉이 민망하고 어색하여, 테이핑을 하지 않은 그의 매끈한 왼손이 낯설어서 키세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손을 쥔 미도리마의 악력은 강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피곤한 줄 몰랐다는 것이다.”
“엥? 아, 아!! 서, 설마 아까 봤슴까? 졸았던 거?”
부끄러운 듯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낮추는 키세의 행동에 미도리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는 대체 시합 중에 자신이 조는 건 어떻게 봤나 싶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델이 꼴사납게 여러 사람 앞에서 고개 흔들며 졸다니. 교복을 입고 있을 때와 모델로서 입고 있을 때의 마음가짐이 다른 만큼 키세는 지금 민망해 견딜 수가 없었다. 키세는 서서히 열이 오르는 볼을 손으로 감싸 가렸다. 한눈팔지 말고 시합에 집중하십쇼. 투덜거리듯 내뱉었더니 미도리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키세를 바라보았다.
“시합도 중요하고 너도 중요하니까 둘 모두에게 인사를 다한 것뿐이다.”
아아, 인사신봉자 나셨네. 키세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말에 조금이나마 기뻐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미도리마의 운세의 영향으로 일어난 매우 특이한 상황일 뿐인데. 한여름의 신기루처럼 다가가면 사라질 그런 사건일 뿐인데. 키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사 다해서 저 좀 얼른 해방시켜 주십쇼. 졸려 죽겠슴다.”
기분이 약간 가라앉자 피곤이 급속도로 몰려들어 키세는 미도리마에게 잡힌 손을 힘주어 빼냈다. 연습시합에 같이 가달라는 부탁이었으니까 시합이 끝난 지금 자신이 더 이상 미도리마와 같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그 말에 잠시 안절부절못하더니 황급히 주장과 감독에게 다가갔다. 가는 도중 몇 번을 다른 이의 가방에 걸려 휘청하고 남이 엎지른 음료수에 유니폼이 젖고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미도리마는 꿋꿋하게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다시 멀뚱히 있는 키세에게 다가왔다. 키세는 그 잠시 사이에 축축하게 젖은 미도리마의 유니폼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말했다.
“미도리맛치, 설마 오늘 운세 최하였슴까?”
그 대답은 참담한 미도리마의 표정과 몰골로 확인할 수 있었다.
“럭키 아이템이 뭐였는데여.”
“운석 조각.”
“못 구했슴까…?”
“직거래를 했는데 아무래도 사기였던 모양이다.”
키세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미도리마는 머리도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키세에게 다가와 데려다주겠다고 고한 미도리마는 로커룸에서 키세를 옆에 두고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여기저기 부딪치고 물벼락을 맞는 난전을 겪고 나서야 키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다른 부원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가 정리 운동을 하고 미팅을 마쳐야 하는 타카오는 따로 귀가를 하도록 허락을 받은 미도리마에게 또 한 번의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미도리마의 왼쪽 손에는 다시 깔끔하게 테이핑이 감겨 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키세의 손이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
키세는 남들이 다 보는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것이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손을 놓으면 바로 미도리마에게 변고가 닥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손을 내어준 채 따라가고 있었다. 자신이 손을 놓으면 미도리마가 정말 죽을 거 같아서.
미도리마는 시합이 끝난 다음에 설명해 주겠다는 말 대로 키세에게 오늘의 오하아사 점괘와 자신의 불운을 설명하고 있었다. 럭키 아이템을 사기 맞았다는 대목에선 키세도 미도리마의 불운을 함께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최악의 궁합이었던 전갈자리, 타카오와 시합에서 호흡을 맞춰야 했다. 미도리마의 운은 최악을 넘어서 극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그 불운을 뚫고 키세에게 온 것이었다.
“왜여?”
“왜냐니?”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뭔가 설명이 있었을 거 아님까? 무슨 조건에 제가 맞았는데여? 쌍둥이자리? 인기 많은 사람? 미남? 아니면 연예인? 미도리맛치, 어느 거임까?”
키세의 질문에 미도리마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쩐지 말을 고르는 기색에 키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데 미도리마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살짝 흔들리는 시선이 키세를 향했다가 빈 허공으로 돌아갔다.
“바보.”
“갑자기 뭠까!”
“조건이 바보였다는 것이다.”
키세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싶었다. 바보, 바보, 게자리의 운을 틔워줄 사람이 바보여야 했단다. 키세는 기가 차서 말을 잃었다. 어이없음을 나타내는 탄성만 줄창 이어 뱉으며 미도리마에게 끌려가던 키세는 잡혀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나보다 아오미넷치가 더 바보잖슴까!”
“그런 바보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야.”
“그런 논리가 어디 있슴까!”
“…그놈이 제일가는 바보라고 해도 내가 불편해서 싫다는 것이다.”
키세는 그 말에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천천히, 봄에 녹아내리는 기운처럼 뻣뻣하게 손을 휘젓던 키세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안 불편하다는 말임까?”
미도리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키세는 아주 잠시 기다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오미넷치보단 편하다고 여겨도 되겠슴까? 또 다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 키세의 속에서 휘몰아치다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미도리마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다시 키세의 손을 잡았다. 키세는 차마 그 강한 온기를 떨쳐낼 수 없었다.
“너라면 거절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막무가내로 끌고 왔으면서.”
“그, 그건 미안하다.”
미도리마의 사과에 키세가 풋, 웃었다. 그런 줄 알면 됐슴다. 키세는 살풋 웃으며 미도리마의 손을 마주잡고 이번엔 자신이 앞서 걸었다. 미도리맛치네 집에 데려다주면 되겠슴까? 괜히 밖에서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십쇼. 키세는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미도리마의 권유를 한사코 마다하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중학교 시절 도중까지 가는 길이 동일했기에 그의 집이 있는 방향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키세는 눈에 띄게 난처해하는 미도리마에게 빙긋 웃으며 길안내를 재촉했다. 길 안내를 꺼릴 때마다 손을 놓고 폴짝폴짝 뛰어 거리를 벌리길 반복했더니 나중엔 순순히 말을 들었다. 물론 그의 상태는 무척이나 좋지 않았지만. 결국 다 큰 남자 둘이 손을 꼭 붙잡고 미도리마 가(家)앞까지 당도하고 말았다. 키세는 처음으로 와보는 미도리마의 집의 외간을 눈으로 훑으며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미도리맛치, 도련님이었네여. 으리으리한 집을 앞에 두고 키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탄사였다. 물론 미도리마의 핀잔을 필수로 얻어내고 말았지만.
둘은 잠시 손을 붙잡고 집 앞에 서 있었다. 키세는 물끄러미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손을 강하게 잡고 있는 것은 미도리마였기 때문에 키세가 아무리 손에서 힘을 뺀들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놓으라는 듯 꼬물거리는 키세의 손을 놓칠세라 다시 꼭 붙잡고 머뭇거리던 미도리마는 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천천히 말을 뱉었다.
“오늘, 고마웠….”
“앗! 오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어색하게 뽑혀 나오던 미도리마의 말은 갑자기 둘 사이를 파고든 낭랑한 목소리에 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미도리마는 허겁지겁 키세의 손을 뿌리치듯 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온 건지 미도리마를 닮은, 그렇지만 조금 더 깜찍하게 생긴 한 소녀가 빼꼼, 현관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키세는 저절로 그 소녀가 미도리마의 여동생임을 알았다.
“여동생이 미인이네여.”
“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라는 것이다!”
“나참…. 네, 네. 나도 얼른 가서 쉬고 싶으니까, 이만 가보겠슴다~.”
누군가 나타남과 동시에 냉랭해진 미도리마의 태도에 또 다시 기분이 착 가라앉은 키세는 부루퉁한 말투로 비꼬며 손을 흔들었다. 미도리마는 잠시 아차하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딱히 나서서 자신의 말을 정정하거나 키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은 부적 하나를 키세에게 떠넘기듯 전해 주었을 뿐이다. 키세는 이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미도리마는 이미 여동생을 스치듯 지나쳐 집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거야 원, 오늘은 하루 종일 기분이 롤러코스터네여, 아주. 아직 미도리마의 온기가 남아있는 부적을 잠시 만지작거리고 있던 키세가 슬슬 걸음을 돌려 집에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날아온 맑은 목소리가 키세의 걸음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잘생긴 오빠.”
“왜요, 미도리맛치 여동생 분?”
여동생은 미도리맛치라는 호칭이 웃겼던지 까르르 웃다가 미도리마를 닮은 예쁜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솔직하지 못한 츤데레긴 하지만, 우리 오빠를 잘 부탁해요.”
깜찍하게 웃으며 귀여운 부탁을 한 여동생은 뭔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세에게 바이바이~손을 흔들고는 톡톡 뛰어 집 안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오면서 오늘 겪은 일을 찬찬히 생각하다보니, 계속 여동생의 발언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미도리마의 바보 발언에도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키세는 집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쉬기 전에 오늘의 ‘오하아사’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는 곧 빨갛게 된 얼굴로 주저앉고 말았다.
“바보는 누가…!! 미도리맛치가 더 바보임다!!”
간만에 속으로 삼켜지지 않은 말은 들을 상대방을 잃고 키세의 방을 방황하다가 또 스르르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운세가 최악인 게자리의 분들은 전갈자리의 동료를 조심하세요. 곁에 있기만 해도 최악인 운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사랑의 힘만 있다면 노 프라블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기회의 좋아하는 이의 손을 마음껏 잡을 수도 있고 악운도 이겨낼 수 있고, 일석이조가 이런 거겠죠?」
쓴 지가 좀 돼서 그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앞으론 글에다가 후기도 꼬박꼬박 적어놔야겠네. 사실 저 바보라고 하는 부분을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부분을 쓰다가 시간이 너무 가버려서 결국 게시판에는 중셉본으로 올리고 새벽에 다 썼다. 사실 손잡는 것까지 운세에 포함이 안 되어 있었는데 쓰다보니까 미도리마가 계속 키세 손을 잡길래 마지막 운세에도 에라 몰라 그래, 잡아라~하고 쓴 기분이다.
소재는 언제나 뭐 쓸까 고민하기 귀찮아서 단편소설 100제에서 데려옴. 차례대로 쓰고 있긴 한데 내가 쓰면 소재가 언제나 뭔지 모르겠어서 난감하다. 흐규...그리고 커플링은 나의 쏠메가 골라줌. 언제나 고맙다 나의 쏠메여...!
내가 가지고 있는 녹황의 분위기는 기본 이런 건지 첫 녹황글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계속 둘이 양방으로 삽질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주로 서로 츤츤대다가? 혹은 제대로 캐치를 못하고. 썸은 썸인데 썸 같지도 않은 썸을...이렇게 주구장창 쓰고 있다. 내 안의 미도리마가 그런가 보다. 사실 둘이 사귀다 헤어지고 서로 그리워서 시름시름 앓는 얘기를 죽기 전에라도 꼭 써보고 싶은데 쓰고 싶은 게 많아서 과연 이 아이들에게까지 순번이 돌아올까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얘기는 그냥 생각하기에도 감성 폭발! 같은 느낌으로 써야할 거 같은데 내 감정이 메말라서...아하하하 단조롭고 삭막한 생활을 하다보니까 인간의 감정을 미디어로만 배우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근데 원체도 남들보다 감정이 밍밍한 거 같기도 하다. 다채로운 감정..원한다ㅠㅠㅠ
아씨, 후기가 왜 한탄이 됐어. 아무튼 녹황...행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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